K-water(한국수자원공사)가 라오스 비엥티앙 주 방 비엥 군의 오지 마을에 급수시설을 무료로 설치한다는 작은 뉴스를 읽었다. 이를 위해 8월 3일부터 1개월간 봉사단 40명이 현지로 간단다. 이 더운 여름, 얼른 라오스인들에게 시원한 물을 선물해주시기를.
라오스는 인도차이나 반도의 최빈국이다. 또한 영화와 영화산업에 대해서 언급할만한 특별한 무엇이 없다. 알려진 것도 거의 없다. 과장 벽이 좀 있는 사람은 “라오스에서는 누가 언제 어디서 무슨 영화를 만들었는지, 앞으로 무슨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 안갯속”이라고 말할 정도다. 이런 상황은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 오늘날 독재정권의 검열과 더불어 돈 때문에 라오스 영화계는 시계 제로에 가깝다. 독립 프로덕션은 금지돼 있다. 나라 안에 영화관은 딱 두 개. 그 어떤 영화도 스크린 상영이 힘든 상황이다. 영화 수입도 거의 하지 않는다. 타이의 영화만 종종 들여올 뿐. 하기야 영화 사올 돈도 없다. 라오인들에게 영화는 아직 먼나라 얘기.
자, 안개를 헤치면서라도 라오스의 영화 이야기를 더듬어보자. 먼저 프랑스 식민지 시절. 이 시기 몇몇 프랑스인들이 다큐멘터리 필름을 촬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남아있는 자료는 거의 없다. 과거의 필름들이 프랑스에 일부나마 남아있을 수 있지만 라오스는 돈 문제 때문에 엄두를 못내고 있는 실정이다. 라오스는 오랜 식민지 경험, 인도차이나와의 30여년에 걸친 전쟁으로 많은 영화자료를 유실하기도 했다. ‘과거의 시기’에 제작됐다는 12편의 영화는 대부분 그 실체가 베일에 가려져 있다.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영화는 단 세 편.
1953년 독립 이후, 왕실세력과 라오애국전선(Lao Patriotic Front)은 경쟁적으로 선동적인 뉴스영화와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냈다. 이 시기의 다큐멘터리 필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1958년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왕실 가족을 촬영한 것이었다.
시엥사반 극장
1959년 한 중국계 라오인이 시엥사반 극장(Siengsavan Theatre)을 열었다. 이 극장은 1980년대까지 영화를 상영하다가 1993년 재단장, 이벤트 및 리셉션 행사장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오늘날에는 폐쇄적으로 운영하는 가라오케를 비롯, 마약 방지 프로그램 등의 교육장으로 활용한다.) 1960년에는 최초의 극영화 <소녀의 운명>(Fate of the Girl)이 만들어졌다.
1960년대 초반 왕실호위대의 선전국이 주도해 <진실의 친구와 비진실의 친구>(Untrue and True Friend), <우리들의 땅>(Our Land)을 제작했다. 상업영화도 등장했지만 장비가 없어 이웃 타일랜드에서 카메라까지 빌려와야 했다. 이 시기의 대표적 영화인으로는 <세 개의 바퀴>(Three Wheels, 1965~1970?)로 유명한 크함킹 반다삭(Khamking Bandasak)을 들 수 있다.
1960~1975년 지방 극장에서는 9편 정도의 영화가 상영됐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제목을 살펴보면 앞서 언급한 <소녀의 운명>을 비롯, <안개가 사라질 때> <사라반 소녀의 심장> <산꼭대기의 호랑이> <수용소 소녀의 눈물> 등. 그러나 누가 어떤 내용으로 만들었는지는 기록으로 남아있는 게 거의 없다. 같은 시기 만들어진 영화들로는 <혁명 20년>(1965), <여름의 승리>(1970), <자유의 땅>(1970) 등도 빼놓을 수 없다. 한편 1974년 기준 비엔티안(Vientiane) 지역에는 16개의 극장이 있었다. 모두 왕실 소유였다. (1975년 이전까지 라오스의 모든 극장은 왕실 소유.)
Lao Art media is now preparing to release new movie called: Kor Pieng Huk, in which the girl who will act as the actress for this movie is Miss. Kay Savanviengkhone, 16, from Sikottabong highschool.
1975년 6세기에 걸친 왕조가 붕괴,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정권은 이듬해인 1976년부터 영화국(Cinema Department)을 통해 국가주의적 홍보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혁명을 찬양하는 영화, 인민주의적 내용의 영화들이 양산됐다. 매년 5편 정도의 영화가 제작됐다. 영화국은 소련, 베트남에서 사회주의적 내용의 영화들도 수입했다.
1970년대 후반 영화국은 과거의 영상자료를 찾아내려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왕조시대의 영상을 찾아내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순수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이미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다. 정부는 또 러시아, 불가리아, 헝가리, 인도, 체코슬로바키아 등의 나라로 영화 유학생들을 내보냈다. (유학생 출신 중에는 솜 오크 소우티폰( Som Ock Southiponh)도 있었다. 그는 1988년 흑백 극영화인 <붉은 메뚜기>(Boa Deng, 영 Lotus)를 제작한다.)
1977년 라오스에 머물던 한 기자가 스파이 혐의로 체포돼 고문을 받다가 추방당한다. 1년 뒤 그는 사랑하는 라오 여인을 찾기 위해 다시 라오스를 찾는다. <러브 이즈 포에버>는 이 실화를 바탕으로 마이클 랜던이 만든 TV 영화. 라오스에서는 당연 수입-상영 금지!
1980년대 들어 영화 검열이 좀 완화됐다. 1983년 솜치뜨 폴세나(Somchith Pholsena) 감독은 컬러 영화 <평원의 총소리>(Gun Voice from the Plain of Jars)를 내놓았다. 라오 인민군(Lao People's Army) 소속의 한 용감한 병사의 이야기를 영상에 담은 작품. 그러나 불행히도 이 영화는 검열에 걸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영화국은 1980년대에 <오래된 마을에서의 새로운 삶>(New Lives in the Old Town, 1980), <코끼리 사냥꾼들의 장소>(Place of the Elephant Hunters, 1982), <국가건설>(Building the Country, 1987) 등의 홍보영화를 제작했다.
영화국은 매년 70편 정도의 외국영화도 들여왔다. 타일랜드, 인도, 홍콩의 영화들이 들어왔다. 심지어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미국 등의 영화들도 들어왔다. 그러나 봄날은 길지 않았다. 1980년대 중반 라오스의 영화 인프라는 거의 붕괴 직전의 상황이었다.
1988년 정부는 영화국을 폐쇄, 대신 국영영화사(State Cinematographic Company)를 전면에 내세웠다. 국영영화사의 역할은 영화국에 비해 축소됐다. 고작 외국영화 배급 등의 한정적 업무만 추진했다. 영화국의 ‘과거 영상자료 추적’도 흐지부지됐다.
라오스계 미국인 배우 Ova Saopeng
라오스계 호주인 영화배우 Ananda Everingham
1990년 초반, 라오스의 영화 인프라는 제로에 가까웠다. 1995년부터 라오스에서는 영화가 실종됐다. 이같은 현상은 2003년 상반기 까지 계속된다. 이 시기 만들어진 영화로는 ‘58년 개띠’ 순다라(Vithoune Sundara) 감독의 <매혹의 숲>(Charming Forest, 1997), <비온 뒤 맑은 하늘>(Clear Skies After Rain, 2001) 정도를 언급할 수 있겠다. 1998년 베트남 영상자료원(Vietnamese Film Archives)은 라오스에 1,181 릴에 이르는 과거 필름자료를 반환했다. 이 필름들은 라오스 해방전쟁 즈음의 시기 라오스-베트남 합작으로 제작된 영상물이었다. 그러나 보관상태가 좋지 않아 현상조차 할 수 없는 것들이 태반이었다.
2003년 라오스 국립영상자료원 & 비디오센터는 8편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8편 모두 왕조의 역사부터 문화, 건강, 여행 등 소재가 다양했다.
이 글의 앞부분에서 오늘날 라오스의 영화는 검열과 돈 때문에 ‘시계 제로’라는 말을 했다. 그러나 라오스의 영화적 잠재력은 나름 대단하다고 한다. 희망은 있다. 어떻게? 검열이 없어지고(그러려면 독재정권이 무너져야), 돈이 생겨야(역시 무너져야......) 할 것이다.
* Tip 1
솜 오크 소우티폰 감독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영화를 공부. <붉은 메뚜기>(1988)를 제작한 뒤 빵집 주인으로 변신했다. 돈을 벌어 영화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는 1977년 정부가 해외로 보낸 유학생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원래 법 공부를 하고싶어하던 사람. 영화는 그의 선택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정부의 제안에 결국 동의, 프라하로 떠났다. 견문을 넓히고 싶은 욕망이 강했던 것이다.
유학시절 그는 Barrandov 스튜디오의 Jan Machane에게서 영화를 배웠다.
프라하에서 공부한 세월이 9년. 6명의 프라하 유학생 가운데 학업을 끝낸 유일한 사람이었다.
유학 중 그는 고국에 들러 16밀리 다큐멘터리 <100만 마리 코끼리들의 나라>(Country of a Million Elephants)를 찍기도 했다.
이 다큐 필름은 졸업작품으로 제출되었으며, 체코의 TV를 통해 방영됐다.
영구 귀국한 것은 1987년. 그는 라오스 국립TV(Lao National Television)에서 감독겸 촬영기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곧 염증을 느꼈다. 시시한 일들이 태반이었으며, 자신의 스킬을 마음껏 발휘할 수 없었기 때문. 그는 라오 국립영화사(Lao State Cinematography Company)로 직장을 옮겼다. 이심전심인지 다른 해외파들도 같이 이력서를 써내고 있었다.
1987년 그는 비엔티안(Vientiane)에서 열린 공산당대회를 35밀리 컬러 다큐멘터리로 제작한다. 같은 해 그는 흑백 다큐-드라마 <붉은 메뚜기(Bua Deng)를 내놓았다. 전반적으로 악전고투였다.
감독에게 주어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필름 살 돈도 없었다. 카메라는 2차대전 당시 구 소련이 사용하던 흉물을 구해 고치고 수선해가며 돌렸다.
게다가 주어진 촬영 시간은 불과 22일. (오죽했으면 한 인터뷰에서 “We had nothing, really nothing!"이라는 말까지 했을까.)
우여곡절 끝에 그는 영화를 완성, 자신의 작품을 라오스, 소련, 타일랜드, 캄보디아, 심지어는 일본에서서까지 상영하는 기회를 잡게 된다. 평가도 좋았다.
1997년 프놈펜에서 개최된 제1회 남동아시아 영화제(Southeast Asia Film Festival)에서 특별심사위원상까지 챙긴 것이다. <붉은 메뚜기>는 <평원의 총소리>와 더불어 기념비적인 작품이 됐다.
하지만 그의 내면에는 아무 간섭없이, 원하는 영화를 만들고싶은 욕망이 꿈틀대고 있었다. 그는 마침내 1989년 직장을 버리고 비디오 프로덕션을 설립하기로 한다. 여전히 화폐가 문제였다.
그가 빵집을 문 연 것은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아내(<붉은 메뚜끼>에서 Bua Deng 역을 한 여배우 Somchith Vongsam Ang)와 열심히 빵집을 운영해 성공시켰다.
5년간 고생 끝에 그는 소원이던 촬영 카메라를 살 수 있었다. 그는 비엔티엔 최초의 민간 스튜디오를 설립, 오지의 소수민족(Lenetene people in remote Bokeo Province)을 다큐로 만들 결심을 했다.
1993년작 26분 짜리 다큐(Lenetene's Spinning Tops)는 이렇게 태어난 것이었다.
이 작품은 이듬해 블어 사용지역이 주축이 돼 개최되는 이벤트(Jeux de la Francophonie)에 출품돼 ‘Medal of Merit’을 받은데 이어, 1995년에는 야마가타 국제다큐 영화제( Yamagata International Documentary Film Festival)에서 호평을 받았다.
그는 이밖에 라오스 전통무용을 담은 <라오 람봉>(Lao Lamvong) 등 몇몇 단편 다큐를 제작했다.
그는 장편 극영화를 만들겠다는 희망으로 <주어진 시간>(영 Given Time, Kala Vela)라는 제목의 120쪽 짜리 드라마를 진작에 써두었다고 하는데, 그 뒤로 영화를 완성했는지 모르겠다.
열악한 영화 빈국에 사는 재능있는 감독의 생존법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우리는 외국과 합작영화를 만들 수 밖에 없다. 외국인은 제작비를 100% 내놓고, 우리는 재능을 100% 내놓으면 된다. 그러다보면 언젠가 좋은 날이 오지 않겠는가. 나는 아시아 영화가 꽃피우고, 그 안에 아로스 영화가 포함되기를 희망한다.”그의 말이다.
* Tip 2
Bua Deng
Cast (Credited cast)
Khanthaly
Amkha Ouparasane
Vongdeuane Phonsavan
Somchit Vongsamang Bua Deng
http://www.culturalprofiles.net/laos/Directories/Laos_Cultural_Profile/-927.html http://www.yidff.jp/docbox/12/box12-3-e.html
http://en.wikipedia.org/wiki/Som_Ock_Southipon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