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마음을 저렇게도 시각화할 수 있구나, 감탄부터 했다. 순전히 심리적인 소재로 SF적 공간을 층층이 만든다. 그리고 놀이기구를 타고 어드벤처 월드를 지나가듯 공간을 갈아탄다. 물론 이 공간들은 모두 인간 내부에 구축된다.
사고 주입. <인셉션>의 주인공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꿈속에 생각을 넣고 빼는 일이 직업이다. 주로 꿈에 침투해서 정보를 빼내는 일을 하지만, 이번 업무는 생각을 심어넣는 일이다. 즉 의뢰인이 원하는 생각을 목표 인물의 꿈에 주입해서 꿈을 꾸는 당사자가 현실에서 판단과 행동을 바꾸게 하려는 것이다. 단 타깃이라 부르는 작업 대상이 이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게 새로운 생각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야 한다. 코브의 의뢰인은 사이토 회장이다. 사이토는 경쟁회사의 상속자인 피셔의 생각을 조정해서 경쟁 회사를 여러 개의 자회사로 쪼개고자 한다. 상대 회사가 거대해 지면 자신의 회사가 생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인셉션, 즉 외부에서 주입하려는 생각의 최종 목표는 돈을 지불하는 의뢰인인 사이토의 기업 이윤이다. 코브가 이 일을 하는 데는 개인적인 이유가 있다. 코브는 부인 살해범으로 지목돼서 소속 회사와 경찰 모두에게 쫓기는 신세다. 그런데 사이토가 코브의 안전과 정착을 보장한다. 일을 마치면 코브가 더 이상 쫓기지 않고 아이들과 함께 살게 해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코브는 이 작업을 위해 전문가로 구성된 드림 팀을 구성한다. 그리고 드림 팀과 사이토는 업무 수행에 돌입한다. 기계장치를 이용해 수면 상태에서 피셔와 꿈을 공유한다. 그러나 미리 설계된 꿈 속에서 피셔와 코브의 무의식이 팀원의 행동을 공격하고 방해하면서 계획이 틀어진다. 난제에 부딪힌 드림 팀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꿈속의 꿈으로, 그 꿈속의 꿈으로 겹겹이 들어가게 된다.
꿈. 생각을 통해서 사람을 조정한다는 아이디어는 생소하지 않다. 생각을 주입하는 방법은 미묘한 사회적 설득이나 반복학습, 감각 박탈을 통한 폭력적인 세뇌 등 다양하다. 그 외에도 의식 상태가 변하는 약물 사용, 칩을 생체에 이식하는 것과 같은 외과적 방법 혹은 최면과 같은 피암시적 방법들도 있다. 영화에서는 현실과 상상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방법들을 고안해왔다. 그러므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꿈이라는 방식을 고른 것은, 아마도 최소한의 현실적 제약으로 마음에 대한 최대한의 상상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놀란이 꿈을 시각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조작적 용어나 장치들을 몰라도 대세를 이해하는데 지장이 없다. 대신 꿈이라는 구조물을 지탱하는 기둥의 위치를 파악해야 한다. 나침반 격인 기둥이 가리키는 주요 방향은 딱 두개다. 물론 자잘한 지류들이 있기는 하지만, 어차피 상영 시간이 두 시간 남짓에 불과하니 마음 속을 더 찔러볼 시간도 없다. 첫번째 목표, 표적인 피셔가 아버지의 회사를 분할하도록 한다. 두 번째 목표, 팀장 코브가 아내의 죽음을 극복하도록 한다. 마음속 세계라더니 목표가 완전 심리적이다. 상담이나 심리치료 같지 않은가. 그리고 상담 역시 대개는 현재 문제로 시작하지만 기억과 과거의 재구성 등으로 연결된다. 이 과정을 그토록 스펙터클하게 보여주는 상상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인셉션>이 보여주는 꿈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꿈의 체계는 일관성이 있다기보다는 절충적이다. 그러나 ‘가능한 한 꿈 자체에 직접 접근하고 싶다’던 융(Jung)을 떠오르게 하는 면이 많으니, 경중을 따진다면 분석심리학적 색채가 짙기는 하다. 어쨌든 <인셉션>에서 꿈의 각 단계에 남게 되는 팀원의 특징이 인간 내면으로 들어가는 대략적 가이드라인이라고 여겨도 상관 없다.
일단계 꿈, 밴을 운전하며 팀원들을 이동시키는 사람은 약물 생산자 유서프다. 약제사는 수면과 꿈을 유도하는 역할이다. 내면에 발을 들일 수 있도록 의식상태를 변화시키는 자다. 이단계 꿈, 호텔에 남는 자는 포인트 맨 아서다. 아서는 이성적이다. 현실적 문제와 내면 사이를 중재하고, 문제를 해결하며, 나머지 단계로 진입하는 팀원들의 안위를 돌본다. 일차 꿈에서 중력이 교란될 때 무중력 상태에 빠지는 단계는 아서의 세계, 즉 이성의 단계뿐이라는 점은 재미있다. 결국 논리적 설명과 분석을 제공하던 이성이 무중력 상태에 방향을 잃으면서, 꿈은 삼단계에서 더욱 깊어진다. 삼단계 꿈, 설원의 병원에 남겨지는 것은 페이크 맨 임스다. 임스는 감정적이고 충동적이다. 임스는 이전 단계 꿈에서는 주로 속이고 위조하는 일을 했다. 즉 보다 본능적이거나 감정적인 문제는 현실과 이성의 세계에서는 본질을 속이고 다른 모양으로 나타날 수 있다. ‘현실-이성-감정’의 순서, 참 익숙하다. 프로이드적으로 보자면 아서의 세계는 현실에게 기억하는 발현몽 쯤 되고, 임스의 세계는 잠재몽 쯤 된다.
원래 계획에서 미리 설계한 꿈은 삼단계까지였다. 사단계는 코브가 가진 개인 의식의 바닥이다. 코브의 상상과 기억, 현실과 비현실, 진짜 감정과 거짓 감정이 뒤섞여 있다. 이곳에서는 죽은 부인 맬이 여전히 살아 움직인다. 이 단계까지 따라 들어가게 되는 설계자 아라아드네는 마땅히 할 일을 하지만, 문제는 코브 스스로가 문제를 해결했느냐는 의문이 남는다. 그리고 코브가 홀로 들어가게 되는 마지막 꿈은 보다 집단적이고 원형적인 형태다. ‘현실과 집을 떠나 방황하던 젊은이가 세상을 떠돌다 조난당한다. 그러다 마침내 파도에 쓸려 낯선 해안에 도착하게 되고, 그곳에서 인생에 대해 이야기 해주는 한 노인을 만난다…’라는 이야기는 여러 문화에서 구전되는 익숙한 이야기 구조다. 그 노인이 사이토든 아버지든, 혹은 누구든. 이 두 단계를 구태여 무의식의 용어로 따지면, 개인 무의식과 집단 무의식이 혼재된 영역으로 그려져 있다.

자가발전식 공포.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관객은 일차적으로 코브의 마음을 따라가며 공감과 관찰을 병행하게 된다. 그렇다면 극에서 코브를 괴롭히는 존재는 무엇인가? 코브를 위험에 빠뜨리고 죽이려는 범인은 부인 맬이다. 그러나 맬은 죽은 사람이다. 당연히 현실 세계에 실재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이 꿈속이라고 똑 부러지게 알려주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다면 맬은 귀신이다. 맬이 예쁘고 섹시한 모습으로 ‘사랑한다’고 속삭여서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식 상상을 조금만 더하자면, 머리를 풀어헤치고 소복입고 무덤 위에 선 여자가 잠시 요사스럽게 예쁜 각시 모양을 하고 나타났다고 표현하면 맞다. 게다가 맬은 툭하면 칼 들고 나타나서 찌르고, 권총으로 쏘아 죽이고, 같이 죽자고 아우성이다. 이 지점이 흥미롭다. 즉 범인 혹은 공포의 대상을 코브 내부로 끌어들임으로써, 외관은 스릴러적이지만, 관객은 은연중에 귀신이나 유령을 보는 듯한 공포를 느끼게 된다. 비약 같은가? 동의하든 아니든, 극이 후반으로 진행될수록, 객석에서는 맬이나 아이들이 나타나면 작은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졌다. 특히 맬이 거느린 환영처럼 출몰하던 아이들이 마지막에 감춰진 얼굴을 돌리는 순간은 마치 유령이라도 보듯 놀라는 사람도 있었다. 또한 일단 죽으면 더 이상 고통을 당하지 않고 공포에서 탈출한다는 설정도 어쩐지 익숙하지 않은가? 결국, <인셉션>은 무서운 귀신 분장 한번 없이, 공포 영화의 정체를 부분적으로 알려준다. 코브의 입을 통해 듣자면, 그것은 의식 밑바닥에 감춘 어둠, 죄책감과 상실에 대한 공포다. 맬처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서 귀신으로 나타나면 가장 무서울 것 같지 않은가? 코브 입장에서는 맬 귀신이 많이 괴롭혀도, 물리치기 어렵고 보내기 어려울 테니 말이다. 좀 더 전문적인 표현을 해보자면, 영화에서 맬은 ‘그림자’로 불리는데, 융의 이론에 따르자면 그림자는 어둡고 사악하며 공격적인 측면으로 꿈속에서 귀신이나 악령으로 나타난다. 놀란이 여기다 코브의 사연과 사랑을 무늬로 넣었다.

<인셉션>은 스펙터클한 심리극 블록버스터라 할 만하다. 또한 뜻밖에 등장인물이나 상황 등은 보는 이의 상상에 따라서 스릴러적인 SF 액션이라기보다는 공포물에 가깝다. 그러나 마음 속이 너무 스펙터클해지는 바람에 내밀한 갈등과 감정이 날카롭게 살아 움직이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감탄은 했지만 감동까지 했다고 하기는 어렵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코브가 마침내 돌아간 곳이 어딘지는 관객 각자가 상상해야 할 결말이다. 꿈에서 깨어나라는 신호음은 에디뜨 삐아쁘의 노래다. 그녀의 노래 <장미빛 인생>의 가사처럼, 어떻게 살든 어떤 꿈을 꾸든, 혹은 그 무엇을 껴안든 과연 인생의 ‘장미 빛만을 보며 행복하게 죽을 수 있을까?’ 사랑의 밤도 후회의 밤도 지나면 되돌릴 수 없고, 끝나지 않고 한없이 취할 수 있는 꿈도 없다.